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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이나 링고에 대해서(펌)
    Modus Vivendi; Way of Life 2012. 8. 30. 13:46

     시이나 링고(椎名林檎, Sheena Ringo). 본명은 시이나 유미코 (椎名裕美子)이며 78년 11월 25일생. 어렸을 때부터 혈행 불량에 의해 얼굴이 잘 빨개져서 예명을 '링고(사과)'로 했다고 한다. 만화가 요시다 텐샤에게 강한 영향을 받고 있어 그의 이름 어감을 참고로 했다는 설도 있고. 비틀즈의 링고 스타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2003년에 수술에 의해서 제거된 인중의 점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시절 여배우 사와구치 야스코를 동경하고 펜으로 그리고 다녔더니 진짜가 되었다’는 본인의 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담으로 여겨진다. 15세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녀는, 중학생 시절 친구와 밴드를 결성했으나 학교 축제 등으로 몇 번 활동을 한 뒤 해산. 그 외, 학교 안팎으로 총 20팀 이상의 밴드의 모든 악기 파트를 겸임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중학·고등학교와 피자가게나 경비원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솔로로서 데모 테이프를 만드는 날들을 보내다

     

    1994년 홀리프로 탤런트 스카우트 캐러밴 출장
    1995년 TMF(틴즈 뮤직 페스티발) 전국대회 장려상
    1996년 YAMAHA MUSIC QUEST-1996 JAPAN FINAL 우수상 (당시의 수상자 가운데 Aiko도 있었다)

    등을 거쳐 1998년 5월 27일, 드디어 [행복론]으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시이나 링고의 데뷔 10주념 기념 앨범 [私と放電] (나와 방전) 이 2008년 7월 2일자로 발매되었다. 소속사 EMI는 5월 27일 시이나 링고 10주년 특설 사이트를 개설하고 링고의 최신 뉴스와 악곡, 영상 시청 외 바이오그라피, 레코드 일람표 등의 기본 데이터와 링고의 스페셜 메시지가 담긴 동영상 스트리밍 및 과거를 추억하는 다양한 컨텐츠들을 마련하는 등 사뭇 법석을 떨었다. 사실 가수로서 본인이 데뷔 몇 주년을 기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의 방증일 수도, 그 가수의 인기를 증명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단순한 마케팅의 일환일 수도, 지나친 요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링고를 아는 이라면 이를 결코 요란스럽다고 생각지 않는다. 아주 평범한 팬들 중에 하나일 뿐인 나조차 악곡의 완성도를 떠나 링고를 현존하는 뮤지션 중 가장 매력적인 여자 중 하나로 손꼽는 현실 이상으로, 오늘날 링고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고도 관심이 없었다면 취향의 문제지만, 이미 일본 최고의 여성 아티스트라고까지 칭하여지기도 하는 링고를 아직까지 몰랐던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눈과 귀를 닫고 살아온 것은 아니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 싶다.

     

    시이나 링고다 1. 다양한 악곡의 스펙트럼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는 그녀의 음악 장르를 ‘Jazz, Pop, Rock, Big band, Punk Rock, Grunge, Chanson, ムード歌謡/Mood songs, 演歌/Enka’ 로 정의한다. 장르 초월 또는 장르간 결합이 흔해빠진 오늘날의 대중 음악에서 팝, 락, 재즈를 묶어버리는 논의는 흥미거리조차 못 되지만 엔카는 무엇이며, 샹송은 또 어떤 조합인가. Instruments 항목에도 singing, guitar, piano, keyboards, Bass guitar, drum, koto, shamisen, harmonica, melodica, harpsichord, accordion 등 기타와 베이스 정도의 일반 밴드에서 다루어지는 악기 뿐 아니라 샤미센, 고토 등 일본 전통악기까지 줄줄이 열거되고 있으니, 그녀의 음악 스펙트럼이 결코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링고의 음악에서 드러나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은 그녀가 결코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쌓아온 각양각색의 취향들이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는 것은 일단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저 아버지는 클래식과 재즈, 팝퓰러 등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대학에서 무도를 전공해서 오랫동안 발레를 하며 예술에 조예가 깊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에는 많은 양의 CD가 진열장 가득 들어차 있었고, 피아노와 기타는 거실에 항시 준비되어 있었다. 부친이 읽는 "레코드 예술"의 백넘버가 수북히 정리되어 있었고, 일요일에는 유미코가 놀자고 말해도 "아빠는 바쁘다"라고 말하면서 "레코드 예술"을 정독하며, 형광펜으로 기자나 레코드평의 주요부분에 색칠을 할 만큼, 아버지가 음악광이었으니 이거 또 평범한 가정환경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4살 위의 오빠가 피아노를 배웠던 영향으로 유미코도 5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에 클래식 발레도 시작했다. 오빠인 시이나 준페이 또한 뮤지션이 되었으니 결론은 결국 태어날 때부터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을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이미 피아노나 발레를 접했던 만큼 처음에 그녀는 피아노 곡이나 발레 음악과 같은 클래식 음악에 흥미를 보였다. 유년 시절, 드뷔시의 피아노 곡 같은 것에 흥미가 있었을 뿐 노래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는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유미코가 좋아했던 것은 클래식의 전통적인 면이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호두깎이 인형>을 보면 작품은 작자의 취향상 여러 나라의 춤이 누가 보아도 즐겁도록 짜여져 있지만 엄밀하게 보았을 때 억지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유미코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표현 방식에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오페라와 발레가, 음악뿐만이 아닌 가사와 스토리, 춤과 세트등으로 총합적으로 보여지는 엔터테인먼트로 서비스 정신이 왕성한 출품인 면도 유미코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유년 시절 유미코의 취향을 완성한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취향도 한 몫을 일임했다. 아버지 취향으로 듣게 된 재즈에서는 니나 시몬이나 사라 본 같은 여성 재즈 보컬의 음악들을 좋아했고 어머니 취향으로 이츠와 마유미와 같은 어두운 색깔의 엔카들을 듣게 되었으니 동세대의 아이들과의 전혀 다른 음악 취향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취향이 전적으로 부모님께 물려받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클래식에서는 아버지와 취미가 변해갔다. 아버지가 모차르트를 굉장히 좋아한 것에 반하여 유미코는 그것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소리가 굉장히 요란해서 신경질적인 음악이야. 모차르트의 양식미는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나는 차이코프스키라던가, 쇼팽이라던가 멜로디가 강하고 팝으로 알기 쉬운 것이 좋아’ 어린 나이에 이 정도까지 독립적인 음악관이 세워질 정도였는데다가 본인이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하고 있고, 곡의 음악적인 구조가 터득되기 시작했으며, 프로의 가창에 익숙해 있었을 수준이니 아이돌 노래 등은 정말 하찮게 들렸을 것이다. 같은 세대의 여자아이들이 히카루 겐지에 빠져있었을 때, 유미코는 “음악을 뭘로 아는거야?!”라고 혼자 분개했다고 한다.

     클래식으로 시작된 시이나 링고의 음악적인 루트 사이에는 블랙 뮤직이 위치한다. 중학교시절, 오빠의 영향으로 서양음악을 듣게 된 것이다. 오빠가 심야,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었던 아메리카의 블랙뮤직 프로그램<소울 트레인>을 함께 보게 되면서 유미코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미국 정말 멋지구나! 일본 따위 별 것 아니네! 이제 난 블랙뮤직만 들을 꺼야!’유미코는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게 된 가수는 마빈 게이. 그러나 당시 이런 이야기는 중학교 교실에서 낄 수 없는 화제였다. 록은 시끄러워서 싫었다. 이후에 그녀의 가사 중에 등장하는 커트 코베인의 너바나조차 병적으로 싫어했다. 토 나오는 음악, 그것이 바로 록 음악이었다. ‘록 따위는 너무 촌스러워’ 록음악이 지배하던 시대를 역행하여 New Edition, Arrested Development, Public Enemy 등 블랙 뮤직으로 귀를 채워가던 그녀였지만 Tony Toni Tone의 앨범 [Sons of Soul]을 듣는 순간, 또 다시 음악적 기호의 대대적 전환을 맞이한다. 기타의 사운드에 크나큰 매력을 느낀 유미코는 기타가 울려 퍼지는 것만으로 모든 음악이 훌륭하다고 느끼게 돼 그 때까지 혐오스러워 했던 록 음악마저도 즐겨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 안에는 흑인 래퍼 Run D.M.C도 하드 록밴드 에어로 스미스도 어떤 위화감도 없이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인지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 성장한 시이나 링고의 작곡이나 연주 스타일은 굉장히 개성적이며 복합적이다. 악곡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앨라니스 모리셋에게 영향받았다는 혀말기 창법이라든지 나카지마 미유키나 토가와 쥰과 유사하다는 가사의 스타일 등. 이처럼 다양한 음악적 경험에서 비롯된 링고의 음악관은 그녀로 하여금 한 가지 음악 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지양하고, 고고의 존재감을 발하도록 하는 데에 크나큰 유산으로서 작용하였다. 그녀의 독보적인 음악 스타일을 일컬어 ‘링고계’라고 칭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녀 스스로는 90년대 전반에 일세를 풍미했던 시부야계를 모방해서, 자신을 ‘신주쿠 계열 자작 연출가 (新宿系自作自演屋)’라고 정의하고 하였다. 이러하다 보니 재능있는 뮤지션들에게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제2의 누구’라는 표현은 결코 링고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면인 것이다.  ‘예측 불능’, ‘종횡무진’이라는 유일무이한 아티스트 상을 확립한 그녀가 바로 시이나 링고이다.

    시이나 링고다 2. 매력만점의 보이스와 독특한 가사관

     흔히 접해본 상황으로, 링고를 소개받아 그녀의 음악을 처음 듣게 된 이들의 반응이 “특이하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이는 백이면 구십 그녀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유미코가 기타에 심취하여 곧바로 일렉기타를 사고 나아가 학교에서 9명의 밴드를 결성하여 ‘슈프림’을 카피하기에 이르는 동안, 악기를 이것저것 연주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보컬에서만큼은 소극적이었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음악이 학교에서도 자신있는 과목이 분명했음에도 노래를 부르는 것이 고통스러워 그녀는 음악 수업을 땡땡이치기까지 했었다. 이유는 자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나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싫어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굉장히 아름다웠고, 아버지는 줄리 앤드류스와, 오페라가수인 마리아 카르스, 캐슬린 배틀의 팬으로, 거기에 걸맞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최고로 생각하여 “유미코의 목소리는 깨끗하지 못해”라고 항상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목소리를 사용하는 직업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부모님 두 분 모두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어린 유미코에게는 열등감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뒤바꿔 놓은 일이 중학교 3학년 학교 축제 스테이지에서 벌어진다. 이 스테이지가 예상 외로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엄청난 반응이었어요. 학생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님들도 전부 일어나서 춤추고 장난이 아니었죠.” “시이나 씨의 노래에는 중학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박력이 있었어요” 라는 어른들도 있었다. 학급친구들도 정말 놀랐다고 한다. “시이나 노래 정말 잘해”라고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흥분한 상태로 말한 친구들도 있었다. 특이한 목소리는 무수히 많은 그녀의 매력 중 하나일 뿐 결코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음악에 특별함을 입혀주는 또 하나의 매력은 바로 ‘가사’에 있다. 링고의 가사는 ‘링고만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10주년 기념앨범의 수록곡 <윤회 하이라이트>만 보아도 전혀 뜻이 이어지지 않는 두 단어가 나열돼 있다. 이는 그녀가 일단 영어로 가사를 지은 뒤 그 발음에 맞게 가차 문자를 나열해 가사를 만드는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 뿐 아니라 한자와 문어조의 말, 고풍스러운 가나 사용법을 사용하기도 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현대시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상징적 가사 등도 그녀만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때로 한두번의 이해 노력만으로는 해석을 불가하는 그녀의 노래가 곡과 분리되어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 멋드러진 기능을 할 것만 같은 건 비단 나만의 기분이 아니다. 네지메 쇼이치 같은 유명 작가에게 절찬받을 수준이라면 가사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작사 능력 또한 알 만한 수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볼을 에이는 아침의 야마테 거리
    빈 담배 각을 버리네

     

    오늘도 또 발길 닿을 곳 없이
    작은 방이 고독을 달래주네

     

    불온한 비명을 사랑하지 마
    미래따윈 꿈꾸지 말고

    확신 할 수 있는 현재만을 되풀이해

     

    나의 이름을 똑바로 불러 줘
    날 만져 줘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라고 인정해

     

    사랑해, 혼자 울부짖으며
    밤 길를 헤메어도 허무해

     

    개찰구의 싸구려 형광등은
    너의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네

     

    일그러진 무상의 먼 날도 세븐 스타 향기를
    맛보는 듯 계절을 불러일으키네

     

    내가 원했던 것 자체인 모순을 유유히 뛰어넘어
    가장 친근했던 너의 목소리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던 것이었겠지

     

    정막을 깨트리는 독일차와 경찰차
    사이렌 폭음 현실계 어떤 방황

     

    <시이나 링고 - 죄와 벌>

     예를 들어, <죄와 벌>에 대해서는, “이것은, 병상에 누워있을때의 내 일기입니다. ‘병이 나거나 하는건 벌인거야’ 라고 자신을 책망하는 기분이 한번에 칼로 베어진 듯한 느낌. <본능>에서 부르고 있는 것처럼 자기 제시욕이나 질투 같은, 내가 생각하는 ‘본능’에 대한 죄일까나. 그래서 <죄와 벌>과 <본능>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본능을 긍정할까 죄가 될까라는 차이는 있지만요.” 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사실 링고의 가사관은 그녀 본인은 자세한 설명이 없는 한 완전히 이해하기에, 구체적인 의미까지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대개의 시들처럼.

      가사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로 또한 그녀의 작품 초기에 그녀 마음 속에 담아둔 뮤지션들이 자주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브스>의 가사에는 ‘커트’, ‘코트니’라고 하는 커트 코베인과 그의 아내 커트니 러브가 등장하며 또 앨범 [무죄 모라토리엄]의 <마루노우치 새드스틱>에는 아사이 켄이치의 애칭인 ‘벤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시이나 링고가 동경하는 아티스트이기도 한 아사이는 그 후 싱글 <죄와 벌>에서 파트로 연주에 참가한다. 그리고 <시드와 백일몽>과 <여기서 키스해줘>에 나오는 ‘시드’는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를 가리키고 있다. 더불어 시이나 링고는 2집 [승소 스트립]부터 자신의 음반에 일관적으로 ‘대칭성’이라는 요소를 삽입하였다. 즉, 각 앨범은 홀수 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 위치한 곡을 중심으로 각각 대칭되는 곡들이 제목의 글자수가 같고, 형태(한자나 가나의 사용), 재생시간 등이 비슷하다.

     

    시이나 링고다 3.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는 비주얼의 힘

     

     나는 정말 순수하게도 링고라는 가수가 예뻐서(!) 좋다. 그러나 이는 시이나 유미코라는 인물의 외모가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악곡 일변도의 컨텐츠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에 시이나 링고라는 캐릭터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너무나도 잘 부합할 만한 매력을 한껏 보여주고 있기에 예뻐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링고라는 캐릭터는 결코 한 가지 모습으로만 대변되지 않는다. 매 앨범, 매 악곡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듯 그녀는 새 노래를 부를 때마다 늘 어제와 다른 새로운 시이나 링고가 된다. 사실 무대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나 뮤직비디오 등을 통해 재현되는 그녀의 캐릭터가 때로 관능적인 미를 발산하거나 파격적인 컨셉을 보이는 것은 마케팅적 이유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상당한 팬들을 양산하는 또 하나의 힘인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링고의 비주얼 표현방식들이 부정적인 면으로 비추어지지 않는 것은 대중이 수용 가능한 파격의 허용 범위 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링고의 파격을 완성한 것은 어제, 오늘에 완성된 기발한 아이디어 수준이 아니다. 링고의 성장 배경은 그녀로 하여금 평범한 사고 수준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고 그러한 성장 과정에 격렬하게 반응하여 스스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수준의 내면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다. 시이나 유미코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식도 폐색증이라는 짐이 있었다. 식도가 위를 향할수록 점점 좁아지는 병으로 식사를 해도 위까지 이르지 못한다. 때문에 유미코는 태어나면서부터 수술을 해야만 했고 이 수술의 영향으로, 성장 과정에서 유미코의 어깨는 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휘어진 것의 인해서 성장한 그녀의 몸은 좌우 대칭으로 움직이질 못했고 그것을 뒤늦게 알게 된 유미코는 결국 유년기 시절의 전부였던 피아노와 발레를 포기하는 데에 이르렀다. 피아노도 발레도 좌우 대칭으로 몸이 컨트롤 되지 않으면, 지속해나가는 것은 될지도 모르지만 프로가 되는 것은 어려워진다. 발레도, 피아노도 서구적인 미의식의 산물로서 좌우 대칭의 미를 중시한다. 밸런스가 무너지는 것은 배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에게는, “나는 제대로 된 예술은 할 수 없는 거구나”는 철저한 패배의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표현의 형태로서 완성도가 높은 것을 목표로 한 탓에, 자신의 몸 자체가 ‘완전한 결락품’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당시 인지해버린 것이다. 유미코는 자신의 몸에 피아노와 발레에 대한 장애가 나타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부모님을 원망했다.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 왜 시켰어. 무엇을 위해서 지금까지 발레랑 피아노같은 것을 해 온거냐구” 그러나 부모님은 유미코를 달래주기는커녕 매도했다. “너는 패배자야” 좌절감에 슬퍼하고 있는 외동딸의 마음에 큰 상흔을 입혀버리고야 만다. 학교 수업 하나하나를 모두 무의미하게 느끼게 되었고  학교 자체에 대한 존재성마저 의문점을 갖게 됬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교실에서 학생모두들과 같은 방향을 향해 앉아야하는 그런 기본적인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규칙에 얽어매어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애들에 대해서 유미코는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모두들 처럼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자신은, 그런 모든학생들 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유미코는 등교거부를 하게 되고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된다. 방문에 책장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담임선생님이 설득하러 왔을 때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부탁이니까 자살하지 말아줘” 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미코에게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춰졌다는 것이 생각 밖의 일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나와 자신이 보는 나라는 것은 정말 다르구나’ 라는 것을 유미코는 일찌감치 깨닫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싹튼, 자신이 ‘여자’라는 것, 아니 ‘암컷’이라는 것에 대한 혐오심 또한 그녀를 특별하게 했다. 유미코가 피아노와 발레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오빠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었다. 4살 위의 오빠였지만 상당히 우수했던 오빠에 대한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의 그녀에게 크나큰 짐이었다. 유미코의 오빠는 국립대학 부속초등학교에 합격했지만 그녀는 같은 초등학교 시험에서 떨어졌다. “니가 바보라서 떨어진거야” 당시에 받은 유미코의 쇼크는 굉장했다. 그녀는 이와 같은 오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발레와 피아노를 선택했지만 그마저도 좌절되었다. 급기야 “내가 여자라서 남자인 오빠에 비해 열등한 것이다”라고까지 생각해버린다. 자신의 몸이 약한 것도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오빠로 인해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난 존재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싹튼 것으로 시작하여 ‘여자는 암컷이다. 품질 나쁜 생물이다’라고 하는 사상이 생성되어 갔다. 유미코가 극단적인 남성혐오에 빠진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유미코가 근처에 우표를 사러갔을 때 가게주인 아저씨가 어린 유미코에게 추잡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뭐라고 말했는지 까먹었지만 내가 굉장히 창녀같다고 생각할 정도의 말을 들어서 굉장히 기분이 나빠서..” 어떤 성희롱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 마음에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잊는 것으로 정신의 안정을 도모한 듯 하다. 후에 인터뷰에서는 당시 아저씨의 말을 “꼬마인데, 성적 매력이 있네-”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고 얘기했지만 어쨌거나 이 사건은 유미코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를 생성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성교육 수업이나, 중학교 2학년 때 시작된 월경은 유미코에게 더욱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심어줄 뿐이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 속에 있는 여성성을 외면하려 했다. 함께 수업을 듣는 주위의 남자 아이들이 ‘수컷’의 시선으로 ‘암컷’인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시이나 유미코에게 있어서 자신이 여자인 것은 ‘어쩔 수 없으며 참아야만 하는 일’, ‘굉장히 싫지만 남자들은 그것만을 보고 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유미코는 남자에게 ‘사귀자’란 말을 듣는 것도 싫어했을 뿐더러, ‘같이 집에 가자(학교에서 집에 돌아갈 때)’라는 말조차 혐오스러웠다. 게다가 학교라는 환경은 유미코가 조심스레 ‘쟤 멋있다’고 말하면 즉각 그 당인에게까지 그 얘기가 전해져 “사귀자”라고 말하게 되는 연쇄반응 같은 상황에 있었다. 이것도 유미코의 일쯤 되면 ‘뭐랄까, 먹이연쇄적인 잘 짜여진 구조!’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성적인 것에 대한 혐오는 후쿠오카의 어느 번화가에서 헌팅을 당하거나, 술집에서 일하지 않겠냐고 권유를 당했던 경험으로 더욱더 격심해졌다.

     

     유미코에게 구원의 손길은 뜻밖의 기회에, 뜻밖의 인물을 통해 내밀어졌다. 별안간 그녀의 기술가정 선생님은 유미코에게 한권의 대본을 건네며 ‘이걸 연습해서 오도록’라며 명령했다. 20대 후반정도의 이 선생님은 아코디언을 항상 끼고 다니는 인물로, 여러 학급의 학생들을 모아서 연극을 지도하고 있었다. 월 1회의 학년집회에서 연극을 발표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유미코처럼 등교거부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학생들의 지도역할을 한 것일 것이다. 대본을 읽고, '재밌다!‘라고 생각한 유미코는 승낙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고 한다. ‘연기라는 거 정말 재밌는걸!’ 유미코는 처음으로 연극의 세계를 체험하고 그렇게 실감했다. 또한 연극의 대사에 곡을 붙여봄으로서 본격적으로 작곡까지 시작하게 되었으니 연기와의 만남은 발레와 피아노라는 수단을 잃은 유미코 인생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게 한 극전인 전환 장치였으며 훗날 그녀가 ‘시이나 링고’라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게 한 발판이었다. 한 때 그녀는 디자인계 학교에 진학하려고도 생각했다. 연극 무대에 섰던 경험을 바탕으로 극작가라든지, 무대미술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유미코는 “형식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관련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이유로 미술의 길을 단념하게 된다. 도상을 통해 투영되게 될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정신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려웠을까. ‘나라는 사람 그대로를 모든 사람들의 눈에 방치되는 것’을 피해 결국에 그녀가 택한 것이 지금의 ‘시이나 링고’다. 이 모든 고민과 경험이 축적되어 결코 자신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이 아닌 다양한 모습의 시이나 링고를 악곡에 절묘하게 녹아들어간 캐릭터를 통해 온 몸으로 또는 무대 앞의 스크린이나 영상 속의 모습을 통해 딱 원하는 만큼만 최대한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이나 링고인 것이다.

     

    동경사변이다

    제 1 기
    Vocal. 시이나 링고(Shena Ringo)
    Drum. 하타 토시키(Hata Toshiki)
    Keyboard. HZM(Hizemi Masayuki)
    Bass. 카메다 세이지(Kameda Seiji)
    Guitar. 히라마 미키오(Hirama Mikio)

     

     동경사변 (도쿄지헨, Tokyo Incidents). 시이나 링고는 당대의 세션맨들과 동변사변을 결성하면서 “메이저에서 활동하면서 이렇게 밴드를 만드는 것은 데뷔 전부터 바라고 있었던 일”이라고 밝힌다. 그녀는 활동 개시 직전의 동경사변을 ‘여기만은 더럽히고 싶지 않은 최상의 형태’라고 표현하며 솔로 활동 당시에 끊임없이 펼쳐보였던 자신의 자아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없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2004년 말, 한 마리 학을 마스코트로 내세운 앨범 [교육]이 등장한다. ‘시이나 링고’에 익숙해져 있는 팬들에게 동경사변의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교육시키겠다는 멤버들의 열정이 불타오르기라도 한 듯 [교육]은 각 파트가 서로에 대한 한 치 양보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연주의 향연을 보여주고, 링고는 그녀가 결성 당시 밝힌 ‘의도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없는’이라는 말에 충실하려는 듯 밴드가 뿜어내는 패기 가득한 에너지 속에 여지없이 녹아들어간다.

     
    Bass 카메다 세이지, 1964년 6월 3일생 뉴욕 출신
     우선 동경사변에서 절대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카메다 세이지. 현재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젊은 프로듀서 중의 한 명으로 프로필에 박혀있는 뉴욕 출신, 와세다 대학교 졸업 등의 코멘트들은 그가 꽤나 엘리트 출신임을 보여준다. 일부에서 시이나 링고를 우리나라의 김윤아와 비교하는 내용들을 본 적이 있는 듯 한데 동감은 안 되지만 그들의 의견에 살짝 동참해주면 동경사변의 카메다 세이지는 자우림에서의 김진만 씨 정도와 비교 가능할 것 같다. 김진만 역시 같은 베이스 파트에 서울 대학교 출신이니. 그러나 자우림에서는 상당히 김윤아에게 많은 비중이 치우쳐져 있는 점과 다르게 카메다 세이지는 동경사변에서의 실질적 리더다. 어렸을 때 클래식 기타와 피아노를 배웠고 14살 때 베이스를 치기 시작했던 그는 대학 재학 중에도 스튜디오를 들락거리며 친구들의 데모 테잎 만들기를 돕다가 89년경부터, 어레인지 프로듀서로서 활동을 시작, 대학 졸업 즈음에는 이미 프로 편곡자 겸 히라이 켄 등의 프로듀서로 일했다. 베이시스트로서도 수많은 세션, 투어에 참가. Do As Infinity, 스피츠, 히라이 켄, 안젤라 아키, 스가시카오, 기무라 카에라, 175R, CHARA, PIERROT, MAY, ROCK'A'TRENCH, 松千, 시이나 링고, 동경사변 등의 프로듀서와 어레인지를 맡았었고 또는 담당하고 있다. 시이나 링고 1집과 2집의 전체 프로듀스를 담당했으며 2003년 동경사변 결성했고 현재, NHKBS2 에 고정출연 중이다. 2007년 제49회 일본 레코드 대상 편곡상을 수상했다.

     

    Drums 하타 토시키, 1976년 10월 5일생 시마네 현 출신
     유년기부터 신악, 전통 북을 즐겨쳤다고 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브라스 밴드부에 재적하며 퍼커션을 담당한다.  고3때부터 드러머로서 카피 밴드를 조직했으며 졸업 후에는 18세에 동경으로 상경, 많은 아마츄어 밴드를 Dr.Perc로서 담당했다. 1998년 밴드 ‘Scope’ 결성, 2002년에는 인디 씬에 데뷔한다. 2003년에 탈퇴한 뒤 시이나 링고의 오빠인 시이나 준페이, 가와구치 다이스케, 내츄럴 하이, 나카시마 미카 등의 라이브, 레코딩 서포트로 참가했으며 2003년 동경사변을 결성한다.

     

    1기_Guitar 히라마 미키오, 1976년 5월 5일생 훗카이도 출신
     10 대때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해 졸업 후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개시, 솔로 작품을 발표하며 인디 차트를 석권한다. 기타리스트로서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음반 작업과 공연에 참여해 일본 음악 씬에서는 가장 함께 공연하고픈 기타리스트에 뽑히기도 했다. 워낙 미모가 뛰어나고 노래도 역시 섹시(?)하게 잘 불러 동경사변에서 시이나 링고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여성팬을 보유하기도 했었다.

     

    1기_Keyboard 히이즈미 마사유키, 1978년 2월 12일생

     4살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99년 일본 음악 씬에 돌풍을 일으킨 사무라이 재즈 밴드 Pe'z의 키보디스트 히이즈미 마사유키로 데뷔했다. 열광적이고 정열적인 퍼포먼스 연주를 하는 액션 키보디스트로 유명하며 개성적인 작곡 실력과 독특한 정신 세계로 시이나 링고와 더불어 동경사변을 더욱 특별하게 꾸며줄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실제로 링고가 아닌 그로 인해 동경사변 팬이 되었다는 이들도, 아직까지 동경사변에서 그의 존재감을 많이 아쉬워 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2월 13일 자로 2집 솔로 앨범 [Pianohead]를 발표했다.

      

    제 2 기
    Vocal. 시이나 링고(Shena Ringo)
    Drum. 하타 토시키(Hata Toshiki)
    Keyboard. 이사와 이치요우(Isawa Ichiyou)
    Bass. 카메다 세이지(Kameda Seiji)
    Guitar. 우키구모(Ukigumo)


      밴드의 심볼이 학에서 공작새로 바뀌었다. 키보드의 HZM과 기타의 하라마 마키오가 탈퇴하고 이자와 이치요와 우키 고모가 그 자리를 메꾸는, 곧 동경사변 2기를 알리는 상징의 지표였다. 두 번째 앨범은 전작의 연장선상에라도 있는 듯 [어덜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교육을 받았으니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인가. 확실히 [어덜트]는 이전의 어수선함을 추스르고 한결 차분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내놓은 세 번째 [버라이어티]를 통해 어른이 되어 자신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동경사변을 즐겨달라고 말하려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버라이어티]에서 링고는 작곡으로는 한 곡에도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결국에 동경사변은 시이나 링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들만의 색깔을 찾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기_Guitar 우키 구모, 1978年10月7日생 치바 시 출신
     본명은 나가오카 료스케. 9살부터 피아노, 중1때부터 기타를 시작했다. 대학교 때부터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2년 시이나 링고의 앨범 [시멘트 정액 밤꽃]에 기타리스트로 참가, 이후에 아날로그 판에만 수록된 <映日紅の花 무화과의 꽃>의 악곡 제공을 거쳐 2005년부터 동경사변에 합류한다. 인디밴드 페트롤즈에서 역시 기타리스트로, 다만 나가오카 료스케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2기_Keyboard 이자와 이치요, 1976年7月4日생 쿠라시키 시 출신
     4살부터 피아노, 중2때부터 기타를 시작했고 동시에 밴드 활동을 개시했다. 고등학교 시절 때부터 보컬도 시작했으며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상경, 새로운 밴드와 함께 작곡 활동도 병행했다. 2004년 말에 밴드 ‘Abfahrt’를 결성, 2005년 초 여름부터 동경사변에 참가했다. 1기의 키보디스트 HZM의 독특한 공연 퍼포먼스에 비하면 상당히 뻣뻣하다는 평이지만 그만의 작곡 스타일과 눈부신 비주얼로 점차 팬 층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시이나 링고의 발자취


    1978.11.25
    사이타마 현 출생
    1994
    후쿠호카 현립 치쿠젠 고등학교 중퇴
    1995
    TMF(틴즈 뮤직 페스티발) 전국대회 장려상
    1996
    THE 5TH MUSIC QUEST-1996 에 출장해 JAPAN FINAL 우수상
    1998.05.27
    솔로 싱글, [幸福論 행복론]으로 데뷔
    1998.09.09
    솔로 싱글, [歌舞伎町の女王 카부키쵸의 여왕]으로 각광
    1999.01.20
    솔로 싱글, [ここでキスして。여기서 키스해줘]를 발표하고 히트. 일반 대중에게도 인식되기 시작
    1999.02.24
    솔로 첫번째 앨범 [無罪モラトリアム 무죄 모라토리엄]을 발표. 싱글의 인기를 힘입어 오리콘 기록.
    1999.04.01
    전국 투어 ‘先攻エクスタシ 선공 엑스터시’ 시작. 대호평 만원사례.
    독특한 스타일로 인정받으며, 언론에 자주 노출되기 시작
    1999.10.27
    커플링 곡을 포함하여 데뷔 싱글 [幸福論 행복론]을 맥시로 재발매. 품절사례 속출.
    1999.10.27
    네 번째 싱글, [本能 본능] 발표. 차트에서도 활약
    1999.11.10
    첫번째 비디오 [性的ヒーリング 성적 힐링 그 첫 번째]를 발표하고 음악성과 더불어 모든 것을 인정받음
    2000.01.29
    [ギブス 기브스], [罪と罰 죄와 벌] 두 장의 솔로 싱글 동시발매. 판매량에서도 좋은 성과를 보임
    2000.03.31
    솔로 두 번째 앨범 [勝訴ストリップ 승소 스트립] 발매. 처음으로 오리콘 챠트 1위를 기록하는 대히트, 음악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나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 여성 록커로서의 입지를 굳힘
    [승소 스크립]의 인기로 [무죄 모라토리엄] 오리콘 재진입.
    2000.04
    라이브 투어 ‘下剋上エクスタシ 하극상 엑스터시’ 실시
    ‘RISING SUN ROCK FESTIVAL 1999 in EZO’ 참가
    학교 축제 라이브 투어 ‘學校 エクスタシ 학교 엑스터시’ 실시
    2000.06.21
    스탠딩 투어 ‘発育ステータス 御起立ジャポン 발육 스테이터스’ 실시
    2000.06
    한정 라이브 콘서트 ‘座禪エクスタシ- 좌선 엑스터시’ 실시
    2000.08.30
    DVD [성적 힐링 - 그 첫 번째], [성적 힐링 - 그 두 번째] 동시 발매
    2000.09.13
    라이브 싱글 모음집 [絶頂集 절정집] 발매
    2000.11.25
    <虐待グリコゲン 학대 글리코겐>의 기타리스트 야요시 쥰지와 비밀리 결혼.
    이 시점에서 링고는 임신 5개월.

    2000.12.07
    콘서트 DVD [下剋上エクスタシー 하극상 엑스터시] 발매
    콘서트 DVD [발육 스테이터스] 발매

    2000
    정규 2집 [승소 스트립]이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에서 ‘올해의 록 음반’으로 선정
    정규 2집 [승소 스트립]으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베스트 앨범상’ 수상

    2001
    일시 활동 중지 선언
    2001.03.16
    솔로 싱글, [眞夜中は純潔 한밤중은 순결] 한정 LP발매
    2001.03.28
    솔로 싱글, [한밤중은 순결] 싱글 CD 발매
    2002.01
    야요시 쥰지와 이혼
    2002.05.27
    솔로 앨범 [唄ひ手冥利~其ノ壱~ 가수의 즐거움~그 첫 번째~] 발매
    콘서트 DVD [賣笑エクスタシー 매소 엑스터시] 발매
    2003.01.22
    솔로 싱글, 茎(STEM)〜大名遊ビ編〜 줄기(STEM)~다이묘놀이 편~] 발매
    단편영화 <短篇キネマ 백색안경> DVD 발매 - 시이나 링고 제작, 감독, 각본, 연출, 음악, 출연
    2003.02.14
    솔로 세 번째 앨범 [加爾基 精液 栗ノ花 시멘트 정액 밤꽃]의 프로모션차 활동중지 선언 후 첫 지상파 출연
    2003.02.23
    [시멘트 정액 밤꽃] 발매
    2003.03
    라이브를 위한 백밴드 동경사변 결성
    라이브 시이나 링고 실연 투어 ‘雙六エクスタシー 주사위 엑스터시’ 실시
    투어 종료 후 솔로 활동 정지 발표
    2003.08.20
    DVD [성적 힐링 - 그 세 번째] 발매
    2003.11.25
    솔로 싱글, [りんごのうた 사과의 노래]를 발매
    2003.12.07
    DVD [Electric Mole (주사위 엑스터시)] 발매
    2004
    라이브 ‘Meet The World Beat’, ‘Fuji Rock 페스티벌’, ‘Sunset Live’ 에 참가
    동경사변 활동 발표
    2004.09.08
    동경사변 싱글 [群青日和 군청날씨]를 발매
    2004.10.20
    동경사변 싱글 [遭難 조난]을 발매
    2004.11.25
    동경사변 첫 번째 앨범 [敎育 교육] 발매
    2005.11.02
    동경사변 싱글 [修羅場 수라장]을 발매
    2006.01.26
    동경사변 두 번째 앨범 [大人 어덜트] 발매
    2006
    영화 <さくらん 사쿠란> 첫 음악감독
    2007.02.21
    솔로 네 번째 앨범 [平成風俗 헤이세이 풍속] 발매
    2007.09.26
    동경사변 세 번째 앨범 [娛樂 버라이어티] 발매
    2008
    영화 <사쿠란>으로 제31회 일본 아카데미상 음악상, 우수상 수상 및 홍콩 국제 영화제 주최 아시안 필름 어워드 작곡상 노미네이트
    2008.07.02
    솔로 앨범 [私と放電 나와 방전]

    데뷔 10주년,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

     

     10주년을 기념하는 스페셜 이벤트들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10주년 기념 제2탄은 9월 17일에 발매되는 콘서트 DVD [좌선 엑스터시]이다. 이외에도 ‘시이나 링고(생) 사과박'08 10주년 기념제’라고 이름을 붙인 기념 라이브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2008년 11월 28일에 개최할 예정에 있다. 사실 시이나 링고는 이미 2003년 5월에 데뷔 5주년을 기념했다. 하라주쿠의 유명 전시관인 LAFORET(라포레)에서 일주일 가량 5주년 기념 박람회 ‘林檎博 링고전’ (정식명칭 : 椎名林檎博覽會 芽生えから實りまで)을 열었던 것이다. 포스트의 서두에서 자신의 10주년 데뷔를 기념하는 자축 이벤트에 대해 자격 운운한 것에 대한 변명쯤 될까. 그녀의 데뷔 10주년은 마땅히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솔로 시절부터 ‘링고사마’, ‘링고공주’ 등의 호칭으로 바다 건너 한국 팬들에게조차 열렬한 추종을 받아왔으니 일본 본토에서 그간 누려온 인기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팬들이 진정으로 그녀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데뷔 이래, 발표하는 족족 기괴하고 종잡을 수 없는 그녀만의 음악 세계로 사람들을 흡입해나간 링고의 무한한 능력이 앞으로도 지난 10년간 보여준 범위 내에 머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시이나링고 공식홈피
    http://www.emimusic.jp/vmc/artist/domestic/ringo/
    도쿄지헨 공식홈피 http://www.emimusic.jp/tokyojihen/index_j.htm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http://www.wikipedia.org/
    라스트에프엠 http://last.fm/
    네이버카페 앙리의시이나링고 http://cafe.naver.com/ringoshiina
    다음카페 시이나링고 http://cafe.daum.net/ringo/
    네이버블로그 능금공작소 http://blog.naver.com/nuengue
    음악평론가 김작가 님의 글 in [버라이어티]
    출처를 알 수 없는 개인 저장고 속 링고 알레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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